태그

레이블이 myStory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myStory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5년 2월 11일 수요일

SW개발자, 프레임워크로 내공쌓기 - 생보사 차세대 프로젝트

오늘은 그 토록 원하던 프레임워크팀으로 전배 한 뒤, 투입되어 5년간 진행했던 2개 대형 프로젝트 중 첫 번째 프로젝트에 대해서 애기 해보고자 한다.

2008년 말, 입사 2년차에 만 2년을 앞두고 원하던 부서로 옮긴 나는, 이제 프로젝트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에는 웬지 모르겠지만 금융권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다. 그 동안, 국방, 공공, 대내 작은 프로젝트만 다녀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웬지 금융권에서 돈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하면 돈을 만질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을까.. 솔직히 그냥 해보고 싶었다.

마침 관계사 중 생보사 대형 차세대 프로젝트가 곧 시작될 예정이였고, 금융권에서는 거의 최초로 기존 레거시 시스템 전체를 Java로 전환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난, 2주 정도 신규 팀에서 OJT를 받다가, 바로 해당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었다.

실은, 그 당시 같은 팀원 사람들을 보면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본사 사무실에서 프레임워크 개발하는 것 보다 훨씬 업무 강도도 세고, 고객 눈치도 봐야 하고, 플젝 납기 기한도 맞춰야 되고.. 이리저리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 일 것이다. 하지만, 난 그게 더 좋았다. 특히, 비즈니스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싶어 했던 의지가 있었고, 젊을수록 더 고생해야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였다. 이런 내 생각과 의지는 앞으로 회사 생활하는 데 굉장히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었다.

해당 프로젝트의 기존 시스템은 Cobol 기반이였고, Java로 전환하기 위해 SDS의 Java Spring 기반의 Anyframe Enterprise 기반으로 차세대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Anyframe Enterprise 내의 OLTP, Batch, BTO(Center Cut)등의 제품들이 적용되었고, Anyframe Integration을 통해 대외계 연계까지도 적용을 한 프로젝트이다. 실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Anyframe Enterprise 버전의 방향성과 로드앱에 대해서 구체적인 plan이 있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대형 차세대 프로젝트의 도메인 지식 기반으로 해서 2년 동안 완성도가 무척 높아졌고, 이후에 대부분의 대형 프로젝트에서 러브콜이 쇄도 했었다. 팀원 모두 수 년간 무척 바쁘게 지내왔었다.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Anyframe Enterprise에 대한 동영상 링크를 공유 한다.
http://vimeo.com/67370902
시간이 얼마 안 지났는데, 좀 유치한듯..ㅡㅡㅋ 현재는 잘 활용하지 않는 레전드임..ㅋ

내가 담당했던 업무는 BTO(Batch Type Online) 혹은 Center-Cut 이라는 이름의 프레임워크였다. 컨셉은 일반 배치 보다 비즈니스 로직이 복잡하고, 단발성 OLTP의 대량 처리를 위한 분산 병렬 처리 프레임워크라고 볼 수 있다.위 동영상의 일부를 캡쳐 해 보았다. 



내가 초기에 그렸던 그림이 이렇게 변한 듯 하다.

Admin은 Center Cut의 작업을 관장하는 녀석이다. Center Cut Job을 등록 및 관리 하며, Job내의 다양한 기본 정보들을 핸들링 한다. 병렬 처리 할 쓰레드 개수라던지, 전처리/후처리 방법, 실행 시간/주기, Job간의 의존성/우선순위 등으로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정의된 Job은 구동시 각 서버에 설치되어 있는 Center Cut Engine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럼 Engine들은 자기가 할당 받은 쓰레드 개수 만큼 쓰레드를 생성시켜, 매핑되어 있는 다수의 WAS로 Online 모듈 호출을 시도 한다. 이는 가령 계좌 이체의 대량 처리인 회사 급여 이체 등의 비즈니스 로직에 적용이 가능하다.

이런 처리 기법은 기존 Cobol 대비 배치성 업무 수행 속도가 현저히 느릴 것이라는 JVM 기반의 Java가 가지는 단점을 보기 좋게 극복하는 좋은 사례가 되었으며, 기존 시스템 보다 오히려 처리 속도가 빨라졌다.

이 프레임워크를 개발 할 때, 일손이 부족하고 국내에는 기술력 놓은 인력들을 구하기 쉽지 않아서, 외주용역을 활용하였었다. 이때, 벨라루시의 한 업체와 업무를 진행하였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영어로 일하는 것이 다소 생소한 시기라 매주 컨퍼런스 콜이나 daily meeting 시에 알아듣기 힘든 러시아식 발음의 영어와 씨름 하기도 하였지만, 곧 적응이 되었고, 외국인 들과 일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한국 개발자들과 일하는 것과의 차이가 커서 힘든 점도 많았지만, 영어 뿐만이 아니라 개발 방식에 대한 부분에서도 배울점이 무척 많았다. 그리고, 오픈 전 1년은 0.5 M/D(한명이 하루 반나절만 지원)만 계약을 하여 업무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필요한 내용들에 대해서 의논하고 대부분의 핵심 업무들은 내가 직접 진행 할 수 있어서 설계 및 개발/테스트 역량을 많이 끌어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던 애자일 방법론에 대해 공부하여 실 프로젝트에 적용까지 함으로써, 애자일 사상에 대해 동경하고 따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었다. 

해당 프로젝트는 24개월동안 많은 사람의 노력과 열정으로 완성이 되었고, 잘 마무리 되어 성공적으로 오픈하게 되었다. 이후 주변의 많은 보험사들이 해당 프로젝트 성공이후에 Java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SDS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행한 제 1금융권 차세대 프로젝트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2010년 11월경, SDS는 Anyframe 프레임워크 전체 제품에 대한 대외 컨퍼런스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때, Center Cut에 대한 발표를 직접 하였었고, 발표자료 링크를 공유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프로젝트 수행 당시 매일 야근과 휴일에 근무하기를 반복.. 연휴도 없이 지내면서 무척 힘들었지만, 가장 열심히 일해야 할 때, 좋은 프로젝트의 전체 싸이클을 경험하면서, 주요한 프레임워크 설계/개발에 깊이 참여하였고, 프로젝트내 개발자와 해외 개발자들과 협업하면서 만들어낸 산출물들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 아니였나 싶다.

>_

기억에 남는 기술 : Java, Spring OLTP/Batch, WebLogic, Oracle, GWT, Apache MINA, JBoss Jgroups, Multi-Threading, Agile development




-- My Story ---------------------------------------










---------------------------------------------------


2014년 12월 31일 수요일

사원 SW개발자의 고군분투 적응기

오늘은 SDS에서의 사원 시절 생활을 적어보려고 한다.

방법론팀에 배정받은 나는 자연스럽게 엔지니어링 업무가 짙었던 형상관리 툴 관련 업무를 맡게 되었다. 당시에 나와 함께 배정받은 동기녀석도 같은 업무 였는데, 나는 주로 SI(System Integration)쪽을 맡았고, 그 친구는 SM(System Maintenance) 쪽을 맡았다. 군대도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데, 이는 향후 둘의 커리어의 방향과 직결되는 것이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땐, 난 성향 자체가 SI 사업이 맞았고, 처음에는 케어(?)를 잘 받지 못 했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커리어를 쌓아 갈 수 있었다.

우리 방법론이 사용하던 형상관리 툴은 Serena사의 Dimensions 라는 제품이였다. 아마, 일반 개발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하지 않을 까 싶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CVS, PVCS등이 주로 쓰여지고 있었고, Subversion도 사용이 많이 되고 있던 시점이였다. 헌데 듣보잡 디멘전이라니.. 해당 툴은 다른 소스 형상관리 툴과는 다르게, 이슈 관리/트래킹이 한 제품으로 되는 솔루션이였다. 아무래도, 방법론과 함께 엮다 보니, 소스 리비전과 이슈가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제품이 선택 된 걸로 생각된다. 하지만, 해당 기능은 짧은 기간내에 수많은 리비전이 만들어지고 커밋/롤백이 난무한 SI 플젝에서는 그닥 어울리는 제품이 아니였다. 하지만, SM기반의 유지보수가 주인 현장에서는 자그마한 커밋도 쉽게 허용이 되지 않아야 하고,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두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현재도 사내포탈과 연계하여 커스터마이징 한 버전이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난 주로 대내외 SI 프로젝트를 돌아디나면서, 형상관리 툴을 세팅해주고, 개발자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주로 했었다. 먼넘의 툴이 설치가 이리도 복잡하던지, 메타 데이터를 오라클 디비에 넣고, 라이센스 서버, 웹 서버 등을 따로 다 설치하고, 버전 업그레이드 되면 동일 작업을 반복하고.. 하여간 손 가는 작업이 무척 많았다. 그리고, Pessimistic Locking 정책에 따라, 소스를 수정하기 위해서 반드시 Check Out을 하여 Lock을 확보해야만 사용 가능 한것이 default 설정이였고, 많은 개발자들이 이런 부분들을 불편해 했다. 솔직히, 형상관리 툴을 교육 하는 것 자체에 대해 무슨 필요성이 있는 지 모르겠다는 개발자들이 대부분이였지만, 일반 형상관리 툴과는 다르게, 사용법이 복잡했고, 이슈까지 연계까 되다보니, 본의아니게 욕(?)을 많이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프로젝트 상주기간은 case by case 였었다. 2~3일이면 끝나는 곳도 있었고, 길면 3개월씩 상주하기도 하였다. 행자부, 교육부, 법무부 등의 공공 프로젝트, 금융권 증권/보험사 프로젝트, 삼성 그룹사 SI 프로젝트, 군 프로젝트 등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돌아다니기 좋아했던 나에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내가 가진 기술을 알리는 작업이 즐겁기는 하였으나, 개발에 항상 목 말라 했던 나는 항상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곤 하였다. 이런 나의 솔직한 마음을 선배 및 팀장님에게 기회가 될 때 마다 이야기 하였고, 개발 거리를 찾던 중, 형상관리 솔루션과 연계하여 자그마한 자체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컨셉은 간단했다. 그 당시의 개발 프로세스의 대한 상태를 그래프화하여 현실성 있는 개발 진척도를 가시화하고, 이를 플젝 전체에 공유하여 동기부여 수단으로 사용하고, 투명화하겠다는 개념이였다. 가령, 개발자가 Task를 할당 받으면 상태는 '개발중' 이고, 개발이 완료되면 소스 최종 커밋 이후 연결되어 있는 Task의 상태를 'PL검토중'으로 변경하면서 담당 PL에게 전달한다. PL은 단위테스트 완료 유무 및 자체 테스트를 통해 개발이 완료되었다고 판단이 되면 '개발완료' 로 변경하고, 그렇지 않다면 '개발중'으로 변경하여 다시 개발자에게 전달한다. 이런 과정을 실시간으로 시각화 하는 개념으로 보면 되겠다.

소스 관리 및 이슈(태스크) 관리가 디멘전 하나로 관리가 되고 있었고, 모든 메타 정보는 오라클 DB에 들어 있었으며, 친절하게도 데이터 핸들링이 가능한 Api가 있었으나, 무척 불편하고 배우기도 어려웠기에, DB의 테이블 구조를 일일히 그려나가면서 개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이런 식의 개발은 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구현할 수 있었다. 단순 JSP형태로 개발한 걸로 기억한다. 껍대기는 어디서 템플릿화 되어 있는 걸 가져왔었고, WAS는 Tomcat.. 크리티컬한 시스템은 아니였기 때문에, HA구성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다. 헌데, 만드는 것 까지는 쉬었는데, 해당 화면을 보는 주요 의사 결정권자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 탈이였다. 처음에는 내 소속 PL의 요청에 따라 개발을 완료하고 나니, TM(Test Manager)가 다른 의견을 보여주고, 그래서 변경하면 PM(Project Manager)가 한 마디 하고, 나중에 프로젝트에 공개하니, 각 모듈 담당 PL(Project Leader)들이 또 다른 요구사항을 내기 시작하고.. 그 당시 한 달 정도면 개발 및 테스트, 배포까지 마무리할 생각으로 투입되었던 여의도  모 증권사 차세대 프로젝트에서 3개월 이상 머물렀던 걸로 기억 한다. 그리 달갑지 않은 기억이였지만, 요구공학에 대한 필요성과 정제 작업, 데이터 수집 및 효과적인 시각화 등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해주었던 플젝이였다.

어느 정도 형상관리쪽이 익숙해지니 다른 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 방법론을 지원하는 툴셋을 통합개발플랫폼 이라고 칭하였고, 결국 나의 업무는 '통합개발플랫폼 개선 및 확산'으로 2년 정도 수행하였다. 형상관리툴에 더해서, EA나 ERWin과 같은 설계 툴, Eclipse 같은 개발IDE(Integrated Development Environment), CI(Continuous Integration)을 위한 Ant, Maven, Hudson 등.. 개발을 위해서 필요한 대부분의 모든 툴에 대해서 경험을 하게 되었고, 서로 연계 하는 작업에도 동참하게 되었다. 정기적으로 진행했던 방법론 교육과정의 실습 환경 구성을 하기도 하였고, 후반에는 전체 툴에 대한 엔지니어링 및 기술 지원 등을 수행하였었다. 이는 SA로 성장하게 되는 좋은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Framework 개발을 하고 싶었던 나에게, 솔루션을 배워서 하는 것 보다는 직접 개발에 뛰어 들어서, 대형 SI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던 욕구가 무척 강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2년차때 소속 팀장이 이러한 내 성향을 잘 이해하고 있던 상황이였었다. 이게 개인 평가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부서를 옮기는 데에는 기여를 하게 된다.

그 당시 회사에서는 엔터프라이즈급 상용 비즈니스 Framework를 개발 하겠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고, TFT가 추진되고 있었다. 1년차때 알던 선배 한분이 해당 TFT에 있었고, 우연히 2년차 여름쯤에 진행되었던, 각 센터/TFT 추진현황 공유시 해당 TFT에서 내부인력 대상으로 인력을 모집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부인력이 대상인 이유는 보안상 이슈 및 내부 역량 강화가 원인이였을 것으로 본다. 그 날, 발표를 마친 선배를 지체없이 쫓아가 농담 한 마디 건넸다.

"선배님, TFT가서 저 불러주신다고 하시더니, 연락이 없으시네요? ㅋ. 잘 지내시죠?"

선배 왈, "오, 인석씨. 오랜만이에요. 안 그래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시간 괜찮아요?"

갑자기 하늘에서 종이 울리는 기분이였다. 난, 선배와 커피숍에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선배는 같은 본부에 옆 센터에 있던 나를 후보로 선정해주었다. 이는 비공식적으로 TFT장에게 올라갔으나, 결국 공식적으로 내 이름 석자가 내부인력 충원 대상 후보 인력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내 소속 팀장이 동의 해주면서 난 팀을 옮기게 되었다. 

실은, 입사 1,2년차 된 사원이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재미가 없으니, 딴 일을 시켜달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겠다. 보통, 본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를때가 많고, 조직적으로 보았을 때는 개인 평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원들보다 2년이라는 개발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의견 개진을 주저 없이 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부서로 전배 갈 수 있었다. 물론, SDS에는 본인이 원한다면 TO가 있는 부서로 팀장 협의 없이 일단 시스템을 통해 신청하여 옮길 수 있는 훌륭한 제도가 있지만, 난 그런 방식은 원하지 않았다. 회사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개인이 가장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에 배치를 하는 것이 회사에서도, 개인에게도 득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많은 인력들이 입사 초년에 적응에 실패하고 회사를 떠난다. 힘든 것도 있을 것이고, 생각 했던 것과 너무나도 다른일들이 본인에게 닥치기 때문인 듯 하다. 우리나라 대기업 문화 상, 신입사원으로 뽑힌 인력이 명확히 무슨일을 해야 될지를 입사 전 부터 제시하고 지켜나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갓 졸업한 대학생들 역시, 본인들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아니면 최소한 본인 잘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한국식 교육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걸 반대로 해석한다면,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회사에 잘 맞는 사람을 뽑는 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많은 돈을 투자하여 키운 다는 것, 그리고 입사 이후에 본인에게 맞는 일이 주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지 많다는 것 등은 장점으로 적용 될 수 있지 않을 까 싶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그렇게도 원하던 프레임워크 팀으로 이동하여, 진행했던 두 개의 대형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 해보고자 한다. 지금 생각 해도, 증말 재미있던 플젝들이다.

To be continued..

2014년 12월 25일 목요일

사회 초년생 SW개발자의 1차 방황기 - 회사 옮기기(HIT->SDS)

사회생활 시작한 이례, 겨울 휴가를 보내는 건 처음인 듯 하다. 이를 기념하여, 지난 글(풋내기 개발자의 대기업 취업 수기) 에 이어, 첫 입사 이후 1년 동안의 행적을 돌이켜 본다. 

현대정보기술(HIT)에 입사하여 처음 배정받았던 부서는 해외금융개발팀(명확하지는 않은 듯..)이였다. 중간에 이름이 한번 바뀌었고, 워낙 짧은 기간동안 근무를 해서 부서명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입사 할 당시 "현대" 그룹이 여러 그룹으로 쪼개지면서, 회사가 많이 어려워졌고, 현대 그룹 소속도 아닌 걸 알고 있었지만, 한때 가장 잘 나가던 규모있는 SI업체 였고, 주변에 입사 지원했던 동기들도 모두 능력이 훌륭했기 때문에, 또한, 베트남에 나갈 수 있다는 기대가 컸었던 걸로 기억 한다.

처음 담당했던 업무는 베트남 농업은행 시스템 유지보수 였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농협은행과 같다고 보면 된다. 회사에 들어가면 최신 기술들을 써 볼 수 있겠지.. 하는 기대와는 정 다르게, 해당 시스템은 파워빌더6 버전에 그리 유명하지 않은 DB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곧, 차세대에 투입될 예정이라며, 기존 시스템을 조금씩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업무가 너무 없었다. 프로젝트도 국가 기반 사업이라, 국가에 돈이 있어야 되는데, 국제 기금을 빌려서 진행하는 형태라, 언제 시작 할 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혈기왕성 했던 나는, 열심히 현장에서 굴러 내실을 다지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무척 불안해 했었다. "이래서야 성장 할 수 있을 까?" 이런 질문이 계속 머리속을 맴돌고 있었다. 게다가, 파워빌더라니.. 마음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 당시 함께 입사하였던 친구 중 같은 부서에 굉장히 일을 잘 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보다 한 학번 많지만 나이는 같았고, 군대는 방위산업체에서 산업요원으로 근무하면서 해결한 친구였다. 보통, 이런 경력을 가진 친구들은 다른 사람들 삽질하고 있을 때, 실제 필드에서 험하게(?) 구르기 때문에, 대부분 개발에 있어서는 다른 인력보다 무시 못하는 내공이 있기 마련이다. 나와도 무척 얘기가 잘 통했고, 나보다 훨씬 세상 물정에 대하 밝았다.

하루는 나에게 다가와 솔기한 이야기를 전한다.
"SDS에서 신입사원 뽑드라..봤냐?"

삼성맨이 되고 싶었으나, 한번 미끄러져본 경험이 있었고, 그 당시만 해도, 막 졸업한 사람만 뽑던 터라, 나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대상에 못 들어갈껄? 졸업한지 몇 년 지났는디?"

하지만 역시, 이 친구는 그냥 나에게 해 본 소리가 아니였다.
"너, 올해 전역했자나. 입사 공고 보면, 올해 혹은 내년 졸업 예정자, 아니면 올해 군 전역자던데?"

난 바로 채용공고를 확인 했고, 두말도 없이 입사 지원을 하였다.
지난번에는 삼성전자를 썼다가 떨어졌고, 솔직히 미련도 없었기 때문에, 전문 SI 업체에서 일하고 싶었던 마음을 유지하면서, 삼성SDS 에 입사 지원을 하였다.

SSAT를 잘 통과하고 면접 준비를 하기 위해, 아주 잠시 자발적인 스터디 그룹에 참여 했었다. 하지만, 개발경험도 있고, 회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나에게, 일반 대졸 예정자 학생들이 진행하던 스터디는 너무나 유치했었다. 물론, 어떤 식으로 면접이 진행 된 다는 것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그 정도는 웹사이트에서도 얻을 수 있는 정보였었던 듯.. 오히려 혼자 조용한 방 안에 앉아서 예상되는 면접 질문들을 유추해보고, 답변하는 모습을 녹화해 놓고 다시 돌려 보면서, 말하는 모습이나 자세, 억양, 눈빛 등을 연습해보고 마음속으로 계속 그려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 까 싶다.

면접은 4개 면접으로 진행 되었었다. 인성 면접, 그룹 면접, 영어 면접, PT 면접 이였는데, 순서는 사람들마다 조금씩 달랐던 듯.. 면접 질문들이 모두 기억 나진 않지만.. 인성 면접에서 중요한 건 솔직함 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난 이미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장생활 관련된 질문도 꽤 있었다. 왜 옮기려고 하는지, 하루 일상 생활에 대해서 설명 해보라고 하던지, 군대에서 SW개발병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 업무를 하는 사람이 군대 안에 있으면, 우리 같은 회사가 군대에서 일하기 어렵지 않겠냐 라던지.. 이런 식의 내용이였다. 그룹 면접에서는 주제를 하나 주고, 찬반을 양쪽으로 나눠서 팀을 가른 다음에 집단 토론 하는 형태로 진행 했었다. 정답을 얘기 하기 보다는 어떻게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눠 가는지, 이끌어 가는지 등을 주로 보는 듯..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답을 할 때 그에 대한 지지 혹은 반대 의견을 개진해 나가면 되었던 듯.. 영어 면접은 꼬리에 꼬리를 이어가는 식의 현지인의 질문, 가령.. 여행을 좋아 하냐, 어디로 가느냐, 거기 가면 머하냐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짧게 답을 했던 듯.. 기억 나는 것 중 하나가.. 서해 뻘에 가서 키조개를 캐는 걸 설명하려다가 낭패를..ㅡㅡㅋ 머 여튼.. 그리고 종이에 질문이 하나 적혀 있었다. 친구가 니 카페트를 더렵혔는데, 어떻게 할거냐.. 머 이런식의 질문에 대해 의견을 얘기 하는 거였다. 나야 머.. I don't care.. 식으로 넘어가면서, 친군데 머 어떻냐고 답을 했었다. 마지막 PT 질문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A, B, C사에 상용 데이터베이스 a, b, c가 있는데,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는 PM이라면 무슨 상용 데이터베이스를 선택하겠느냐 라는 것이였다. a는 오라클, b는 이름은 알려져 있지만 많이 사용하지는 않는 것.. 그리고 c는 SDS자체 솔루션이였던 듯..ㅡㅡㅋ 시스템의 크기가 그리 크기 않았고, 내 생각에는 오라클을 쓰는 것 보다는 그나마 인지도가 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b 제품을 쓰는 것이 좋겠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쓸 필요가 있겠느냐 라는 식으로 답을 했다.. 면접관들은 별 질문이 없었고, 끄덕 였던 듯..ㅋ

솔직히 면접 준비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다른 입사지원자들과는 다르게 2년 반 정도의 개발 경력이 있었고, 적당히 화려한(?) 말빨 덕분에 어렵지 않게 통과 하였다. 해서, 2006년 12월, 공식적으로 삼성SDS에 입사하면서, 그렇게도 그리던 삼성맨이 되었다.

삼성 입사 확정 메일을 열었을 때의 기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해냈다는 느낌, 그렇게도 바라던 꿈을 이루었다는 일종의 성취감, 그리고 가족들의 축하 등 잊을 수 없었던 순간이였다.

삼성의 초반 교육은 무척 빡셌다. 입사 4주전부터 SDS인의 소양(개발능력)을 키우가 위한 교육이 진행 되고, 입사 후 4주간은 그룹 교육을 타 그룹사원들과 받는다. 이후에 2주간 다시 SDS 입문 교육을 받았다. 교육 내용을 자세히 얘기하는 건, 예의가 아닌 듯 해서 skip 하겠음.. 대신, 입사 4주전부터 받았던 교육에서 만났던 반 동기들은 지금도 매년 송년회를 할 정도로 친하게 지내고 있고,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의 동반자 들이다. 같은 회사에 있건 없건..

교육이 끝나고 가장 관심이 많은 부분은 바로 부서 배치가 아닐까 싶다. 내가 입사할 당시에는 1~3지망 까지 원하는 부서를 명시하고, 교육 중 받은 평가 점수에 따라, 부서 배치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에 SI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인력을 수백명 뽑았는데, 가장 빡센 부서라 소문이 돌아서 어떤 여사우는 눈물까지 보이는 상황이 연출되기도..ㅡㅡㅋ 나는 입사할 때 부터 프레임워크에 관심이 많았다. 그냥 맨땅에서 굴러보니 프레임워크에 대한 중요성도 알고 있었고, 훨씬 그 분야가 재미있었다. 해서 현재는 없어졌지만 생산성 혁신 본부의 IT Engineering 센터에 지원하였다. 그 당시에 TO가 3명이였는데, 부서가 자산팀, 프레임워크팀, 방법론팀 크게 3개 여서 한팀에 한명씩 뽑는 걸로 기대하고 지원해서 내부 면접을 보게 되었다.(대부분의 부서는 면접 과정이 없다.)

하지만, 면접 당일날 해당 TO는 방법론팀에게 할당 된 3개의 TO 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자산팀은 내가 입사하기 전에 인력을 할당 받았고, 정작 가고 싶었던 프레임워크 팀은 추후에 뽑을 예정이였다. 순간 머리속이 하얘졌다. 방법론? 생소했다. 방법론이 먼지, 가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타 본부로 가는 것 보다는 옆 팀에라도 있으면 나중에 프레임워크쪽으로 갈 수 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면접시, 프레임워크 관련된 내용만 준비했던 것에 방법론 관련 내용을 살짝 추가하여 진행했었다.

물론 내용은 엉망이였겠지만, 그 당시 면접관이셨던 3분은 모두 만족해 하는 분위기였고, 특히 군대에서 표창을 받은 내용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였다. 해서 나는 방법론팀으로 조인하게 된다. 이때, TO가 3명이였지만, 면접자중에 뽑을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아서, 2명만 뽑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센터에는 신입사원을 바로 한 해 전 부터 뽑기 시작했고, 전년도에도 2명만 뽑혔다고 한다. 그 정도로 사원의 비중이 적은 곳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듯.. 생산성 혁신을 신입사원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 까..ㅋ 하지만 허드렛일도 많다보니 필요해 보이기도 했다.

해서 난 방법론의 신입사원이 되었고, 처음으로 맡았던 일은 방법론 기반하에 만들어진 통합개발플랫폼의 형상관리 솔루션 적용 지원 업무를 맡게 되었고, 곧 전체 통합개발플랫폼 확산 관련 업무를 하게 된다. SDS에서의 생활은 다음 포스트에서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나름 많이 성장하게 된 계기가 된 듯.. 이런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은.. 본인이 무얼 하고 싶은지 그리고 멀 할 수 있는 지 고민하여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솔직함과 본인을 어필 할 수 있는 능력이 꼭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꿈을 계속 쫓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라는 점.. 등 인듯 하다.

그럼 오늘은 이만..

>_



-- My Story ---------------------------------------










---------------------------------------------------

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풋내기 SW개발자의 대기업 취업 수기

증말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쓴다. 꾸준히 블로깅 하는 것도 쉽지 않은 듯 하다.
요즘 날씨도 음청 춥고, 연말을 맞이하면서 올해를 돌아보다가 문득, 스스로 했던 약속들을 기억해내고 다시 들어왔다.

오늘 이야기는 군대를 졸업하면서 동시에 취업을 했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감회가 무척 새롭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한 나는 군대 전역을 앞두고, 다들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병사들에 비해, 바로 실업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무척 불안했던 걸로 기억한다. 밤에 잠도 잘 못 잔듯..

전역을 한 4~5개월 정도 앞두고, 나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부터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습관이 든 듯 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여러가지 옵션이 있었다. 학벌 세탁을 하기 위해, 좋은(?) 학교로 학사편입을 할 까, 아니면 석사에 진학하여 가방끈을 더 길게 만들어서 경쟁력을 높여 볼까, 아니면 지금 상태에서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 들어 갈까..

A4용지에 여러 옵션들을 적어 놓고 선을 그은 다음, 장/단점을 비교해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학사편입을 하게 되면 학벌은 올라가겠지만, 졸업 이후의 나이 때문에 오히려  취업하기 힘들어 보였다. 석사는 맘만 먹으면 진학 할 수 도 있었겠지만, 솔직히 하고 싶은 공부/연구가 뚜렷이 없었다.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해서, 난 취업 전선에 뛰어 드는 걸로 결정하고, 회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두 개 있었다. 학점과 영어점수였다. 대학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졸업시에 최소 3점대는 넘겨야 된다는 이야기에 계절학기를 3번이나 들어가면서, 3점 중반대를 겨우 만들었었던 것이 다행이였다. 영어 점수는 그때 당시 공대쪽은 토잌 680점대가 커트라인이였던 걸로 기억 한다.  아무 준비 하지 않고 봤던 토잌 점수는 너무 부끄러운 수준이였다. 기억도 안난다 몇 점이였는지.. 이후에 토잌 책 사서 2~3번 정독하고, 필사 하고, EBS로 감 잡고, 한 3개월동안 토잌만 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까지 그때 만큼 영어 공부만 했던, 그리고 할 수 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취침시간에 모포 뒤집어 쓰고, 조그마한 렌트키고 공부도 하고, 밤새 귀에 리스닝 테이브를 무한 반복으로 해 놓고 자고 그랬었다. 3개월뒤에 본 토잌 점수에서 커트라인을 훌쩍 넘기며, (그렇다고 점수가 그리 좋진 않았다..800점선이였던 듯..) 한 숨 돌리게 되었다.

이제 회사 얘기를 해 볼 까..

사실, 난 군대에 있을 때 삼성맨이 무척 되고 싶었다. 누군들 국내 제 1의 업체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까.. 군대에 있을 때, 삼성 관련된 책들을 스스로 사보고, 즐겨 읽기도 하였다. 주변에도 어찌나 이야기를 했던지, 부대 사람들도 대부분 내가 삼성맨이 되고 싶어하는 걸 알고 있었다.

해서 여러 계열사 중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내가, SW개발병 경험을 가지고 입사가 가능했던 회사를 골랐다. 바로 삼성전자와 삼성SDS.. 두 회사 중에서 무척 고민했었던 걸로 기억했다.  SI업을 해보고 싶었던 나에게 삼성SDS가 당연한 선택이라 생각할 수 도 있었지만, 웬지 계열사 중에서도 가장 앞서 나가고 있었던 삼성전자 SW연구소(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에서 일하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때는 회사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던 것 같았다. 중복 지원도 불가해서 무작정 삼성전자에 입사 지원서를 냈었다.

그리고 삼성에만 목 매달수는 없는 노릇..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계열사들의 IT를 담당하는 SI업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여러 회사를 리스트업 했다. LG CNS, 현대정보기술(HIT), 아시아나IDT 등 이였다. 그리고 군 생활을 하면서 육군본부에서 만난 회사도 있었다. 그 중에 한창 유비쿼터스 시대로 RFID가 한창 거론될때 LG 히다찌라는 회사도 리스트에 넣었다.

그리고서는 자기소개서, 입사지원서를 쓰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매력적인 자소서는 아니였던 덧.. 하지만 신경 썼던 부분은 각사마다 자소서 형식, 길이가 모두 달라서,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쓰려고 노력했던 걸로 기억 한다. 삼성은 자소서가 무척 짧았다. 말을 최대한 줄여서 핵심만 말하는 데 주력했다. LG는 겁나 길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머지 회사들은 기억이 잘 안난다..ㅡㅡㅋ 여튼 내용 자체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

그리고는 입사 시험 및 면접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SSAT를 봤는데, 면접 까지 못 간 듯.. 헌데 지금 생각 해 보면 잘 된듯 하다.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서류/시험까지 통과하고 면접까지 본 회사는 LG CNS(경력수시), LG 히다찌(신입수시), HIT(신입공채) 3개다. 나머지 회사들도 서류는 모두 통과 했지만, 입사 시험에서 미끄러진 듯 하다. 아시아나IDT 같은 경우는 한자 시험을 보면서 무척 괴로웠던 걸로 기억 한다.

여튼, LG CNS는 경력으로 면접을 봤는데, 군경력이였던 걸 몰랐던 듯..ㅡㅡㅋ 좀 어이 없어 했던 것 같다. LG 히다찌 같은 경우는 PT도 했었고, 분위기도 좋았다. LG히다찌는 준비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히다찌는 일본의 엄청나게 큰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난 잘 모르는 회사였고, LG 히다찌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었다. 그 당시, 인터넷 카페가 유행하던 시절이였는데, 웹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LG 히다찌 내부 인력들로 구성된 카페를 찾게 되었고, 시샵에게 메일을 한통 썼었다. 거기 입사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냐고.. 결국 그 분이 인사팀에 연락해서 면접까지 무난하게 갔던 걸로 기억한다. PT도 재미있었다. 현재 RFID의 장단점을 분석해보고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멀 해야 겠는 지 피력해보라는 것이 과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쉽지 않았던 과제 같은데, 잘 준비해서 면접관들도 만족했었다. 마지막에 LG 마크를 띄우면서 확대하는 애교도 보여줬던 듯.. 허나 회사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았다. 한 건물 한 층을 다 쓰고 있었는데, 높은 파티션 하나 없이 수십명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었다. 얼굴 들면 끝에서 끝이 다 보이는 그런 느낌..(최근에 LG 타 계열사를 방문했었는데 거기도 사무실 모양이 비슷했다.) 너무 답답했다. 마지막에 면접을 본 HIT는 수 년 만에 시행되는 신입공채 였다. 같이 면접을 봤던 사람들도 얘기를 해 보면, 보통 내기들이 아니였다. 그리고 면접은 몇 차례 진행 되었는데, 마지막 면접이 CEO와의 면접이였다. 인상 깊었던 부분이 영어로 자기소개를 시키고 모두 중간에 잘랐던 점.. 그리고 베트남 프로젝트에 투입시킬려고 하는데 갈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그럴려고 입사 지원 했습니다. 라고 했던 점이 기억 난다.

해외에도 관심이 많았던 나는 결국 HIT에 입사하게 된다. 마북동에 있던 현대 연수원에서 꽤 질 높은(?) 교육도 받고, 산속 꼭대기에 지진에 대비한 설계가 되어 있던 건물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HIT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 편 글(HIT -> 삼성SDS)에서 이어 나가겠다.

내가 취업하던 시기도 그리 좋은 시기는 아니였으나, 요즘은 정말 너무 너무 취업하기 힘든 듯 하다. 하지만, 기업 역시도 제대로 된 사람을 구하지 못 하는 현상이 갈 수 록 심화되는 듯 하다. 대기업에 신업사원으로 입사하는 건,튼튼한 중견/중소기업에 입사하는 것 보다 더 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뽑기 보다는 회사에 잘 어울리고 잘 배울 수 있는 사람을 뽑기 때문이다. 오히려, 뛰어난 기술은 있는 데, 이런 잣대에 어울리지 않아 입사 못 하는 사례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취업 준비를 하는 과정 자체 부터가 일을 시작하는 순간이라 생각 한다. 그때 많은 것을 배웠고, 회사에 취업해서도 원하는 위치에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 한다. 

혹시나 취업 준비를 하면서 이 글을 읽게 되는 후배들이 있다면, 힘내라는 격려의 말 한 마디 전해주고 싶다. 파이팅!! 

>_



-- My Story ---------------------------------------










---------------------------------------------------



2014년 8월 4일 월요일

SW개발자의 군생활 - SW개발병(현 SW관리병) part 2

오랜만에 포스팅이다. 몇 주간 정신이 없었던 듯.. 번역도 하다 보니까 글 쓸 시간이 부족했다. 각설하고..

지난 포스트에 이어서 SW개발병으로써 참여했던 두 번째 프로젝트에 대해서 얘기 해 볼까나..

첫 번째 프로젝트는 Java 기반의 Standalone 시스템이라 하면, 두 번째 프로젝트는 전형적인 JAVA 기반의 웹 프로젝트 였다.

하루는 특전사령부에서 파견요청이 들어왔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위님과 함께 방문했다가 얼마동안 묻혀 살았던 듯..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이름하여 '낙하산 관리기록부'..

특전사령부에서 낙하산은 무척 중요한 물품이다. 높은 하늘에서 뛰어내릴때 뛰어내린 사람의 목숨을 지켜주는 건, 적절한 시기에 펼쳐지는 낙하산일 것이다. 무척 튼튼한 재질로 만들어진 낙하산은 오랜기간동안 사용할 수 있게 설계 되어져 있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해서 생산년도와 몇 번이나 사용했는지, 수리를 한 이력이 있는지 없는지 등의 데이터가 낙하산을 관리하는데 주요한 척도가 된다. 내가 투입되기 전 까지는 모든 데이터가 '수기'로 작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에는 실수가 있기 마련이고, 데이터 집계도 쉽지가 않다.. 해서 이런 실수로 인해 제 때 교체하지 않은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린 사람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중요한 시스템이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JSP 와 Oracle의 조합으로 아는 수준에서 만들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프레임워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JSP로 코딩을 시작한 초보 개발자들은 한번쯤은 HTML태그와 Java코드가 지저분하게 섞여 있는 소스를 보다가 짜증을 낸 경험이 한번쯤은 다 있으리라 생각 한다. 그때 당시에는 지금처럼 Spring이 유행하지 않았었고, MVC패턴을 잘 적용할 수 있는 Struts가 살짝 붐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해서, Struts를 나름 공부하여 적용하기 시작 했다. URL끝에 .do 를 붙여서 매핑한 화면이 뜰 때 무척 신기 했던 기억이 난다. WAS는 머였드라.. 기억이 안난다.ㅋ

내가 관여 하지 않았지만 기억 나는 플젝중에 하나가 육군 홈페이다. 그 당시 '움직이는 그림' 혹은 '플래쉬'라는 것 자체가 무척 인상 깊은 요인으로 자리 잡았던 시절인데, 홈피 개편을 위해서 육군 전체 인력 중에 웹디자인 기술이 있는 인력을 육군 전산소로 파견을 보낸적이 있었다. 그때 2명이 착출되서 투입이 되었는데, 그들이 하는 디자인 관련 업무를 보면서 처음으로 그런 작업이 무척 어렵고 위대한지 깨달았다. 탱크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서 사진을 오린다음에 투명화 작업화 하여 겹치게 표현하고,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로딩하게 하는 작업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친구는 유명한 모 대학의 디지털미디어 학과 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전역하고 개인 작품전이 있어 초대도 받고 그랬었다. 지금 잘 사나 모르겠네.. 이 친구가 위 낙하산 관리 프로그램 메인 페이지에서 낙하산 타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사진을 제공해줘서 플젝이 더 빛이 났었다..ㅋ

또 하나는 워게임이다. 그 당시 델파이였나.. 파워빌더였나.. 둘 중에 하나로 전쟁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 같은 걸 만들어서 사용하곤 하였다. 직접 관여 하진 않았지만, 복잡한 알고리즘을 녹여서 전시의 상황을 시각화하여 표현하는 서버-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은 충분히 재미있는 아이템이였던 듯 싶다. 이 외에도 다양한 플젝이 3개 내무반을 꽉 채우는 SW개발병에 의해 개발/운영이 되었었다.

내가 속했던 육군전산소(현 정보체계관리단)는 독특한 야간근무를 수행했다. 바로 보안 관제, 전국의 육군망에 대한 트래픽을 모니터링하고 바이러스가 침투하는 위치를 파악하여 차단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그 당시 해당 업무를 매일 하던 병사들은 Cert 병이였고, 야간 근무는 타 병사들이 돌아가면서 섰었다. 관제실에 전방에 있는 커다란 화면에서 전군의 트래픽이 실시간으로 로딩되고, 필터링에 의해 바이러스로 예측되는 녀석이 붉은 색으로 표기가 되면, 해당 부대에 바로 전화를 해서, IP 불러주고 네트워크 선이라도 뽑으라고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해당 사항은 근무일지에 수기로 적어서 보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안 하겠지. 가끔, 업체 분들이 작업을 하기 위해 방문하여, 야간&새볔 내내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끔이다기 보다는.. 자주 있었다. 그럴 때 마다, 그 분들 쉬실 때 커피 한잔 마시면서 일에 대해서 조언도 얻고 그랬었다.

그 분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절대로 이 바닥에 발을 들여 놓지 말아라~!' ㅡㅡㅋ 그 때 당시에는 왜 그런말을 했는 지 이해를 못 했지만, 그 당시.. 그리고 지금도 IT쪽 업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 하기 때문에 했던 이야기들이 아니였을까.. 그래도 난 SI가 하고 싶었다. 힘들다고 하지만, 무슨 일이든 안 힘든일이 어디있을까.. 이왕 고생할거면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렇게 지낸 2년동안의 SW개발병 생활은 나의 업을 선택하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함께 작업했던 녀석들도, 이름 데면 알만한 업체들의 개발자로 고군부투 하고 있다. 조만간, 회포나 한번 풀어야 겠다.

이번 포스트는 여기까지.. 

>_

2014년 6월 8일 일요일

SW개발자의 군생활 - SW개발병(현 SW관리병) part 1

오랜만에 글을 쓴다. 매주 하나씩 쓰려고 했는데, 몇 주간 발등에 떨어진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각설하고..

오늘은 SW개발병으로 지낸 군 생활을 하고자 한다.


앞 글 에서 언급했듯이, 난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뒤, 핵심기술특화병 중 하나인 SW개발병으로 육군 병사로 입대하였다. 현재의 정확한 주특기 번호 및 명칭은 '175262 S/W관리병' 이다. 2004년 당시에는 대졸에 정보처리 산업기사 / 기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JAVA/JSP 관련 경험이 있으면 들어가는데 큰 무리가 없었던 걸로 기억 한다.


입대 당시, 훈련소에는 나보다 나이 어린 애들이 대부분이 이였고, 심지어는 교육을 담당했던 병사도 나보다 어렸는데 속였다가 걸리고 그랬었다. 지금 생각 해보니까 나이도 한참 어린애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 무척 기분 나빠했었고,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훈련소 동기들은 나이 많은 대접(?)을 해줬었고, 6주의 훈련 기간동안 나름 의미있는 시간을 보낸듯..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는 나이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었으나.. 내 나이가 배치를 받은 육군전산소(현재 정보체계관리단)의 평균 나이 정도 여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마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였던 듯.. 입대 동기들은 대부분 나와 나이가 같았고, 선임들은 결혼해서 애도 있는데 이혼한 사람도 있었고, 여튼 다 '어른' 이였다. ㅡㅡㅋ

5개 내무실만 있던 작은 부대였던 육군전산소는 육군 유일 전상병으로만 이루어진 부대였고, 규모가 크기 않아 육군 전산소의 헌병대가 있던 건물 3층에 3개 내무실만 있던 모 부대(무슨 정보 관리 하는 부대였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나네..ㅡㅡㅋ)와 같은 층을 썼었다. 같은 층에 타 부대원들과 화장실(샤워실, 세탁실)과 공유 장소(탁구실, 체력단련실, PC방 등)를 공유 하면서 자주 다퉜던 걸로 기억 한다. 하루는 이발을 하는데 난 상병이였고 옆 부대 개념없는 이등병이 ㅈㄹ하는 바람에 싸운적도 있었다. ㅋㅋㅋㅋ

5개 내무실 중 마지막 1개 내무는 운전병들을 포함한 행정병들이 모여 있는 내무실이였고, 나머지 4개 내무실은 육군 본부의 각 산하 기간들과 관계 있는 부서의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현재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지 모르겠으나, 난 그 당시 군수 관련된 부서에 배정된 3~4명의 병사중 한 명 이였다. 이외에도 여러 참모부의 여러 과에 소속된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내무반을 이루게 된다. 여기서 다루던 프로젝트는 자세히 말하기에는 보안상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산화 프로젝트 중에 외주 주기에는 다소 가볍고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프로젝트.. 좋은 예로 예비군 홈페이지 정도 되겠다. 또 나름 중요한데 보안상 외주 업체에게 데이터를 모두 공개하기 어려운 프로젝트.. 가령 워게임이나 전시에 사용하는 예측성 프로그램 등 을 영관급 장교 - 군무원 - 개발병과 함께 개발하여 사용하게 된다.

내가 관여했던 플젝은 크게 2개 였다. 첫번째는 전시 상황에 각 부대에 미치는 피해상황을 예측하는 프로그램(편의상 A 프로그램)이였고, 두번째는 특전사 낙하산을 관리하는 프로그램(B프로그램)이였다. A프로그램은 입대 당시 이미 L모사에서 무슨 큰 프로젝트 수행시 곁다리(?)로 이미 만든 프로그램이였다.  MFC 기반의 C/S 프로그램이였고, DB 는 Informix, DB 관련된 로직은 Pro*C로 개발이 되어 있었다. 프로젝트 투입당시 사수는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이였고, 그때 당시에는 어린나이에 이것저것 다 하고 있는 것이 대단해 보였었다. 그 친구가 전역하고 혼자 맡게 되었을때 매번 마주치는 비즈니스 파트너(고객 혹은 갑)가 모 중령님이였다.

이 분은 정말 대화하기 힘든 분이였다. 머.. 중령과 일개 병사와의 대화가 있을 수 있는 지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겠지만..(대부분 그렇지.. 중령이면 일반 부대에서는 얼굴도 한번 마주치기 힘든 사람이니..) 워낙 막무가내였고, 안되면 '나라의 명령' 이라느니 머라느니 하면서 말도 안되는 논리도 사람을 뭉개기 일쑤였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듣고 있는 사람 모두 열받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였다. 게다가 제대로 만든 프로그램도 아니고, 정식 offer없이 받은 프로그램이다 보니 유지보수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인수인계도 엉망이였으니 짜증날만 했을 것이다. (그때는 이런 생각 못했었다.ㅡㅡㅋ) 게다가 이 프로그램은 군에서 수행하는 가장 큰 훈련(태극훈련, 을지훈련 등) 수행시 고위급 장관들에게 보고 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척 중요한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내가 만약에 이 분과 군생활을 계속 같이 했었다면, 아마 프로그래머로서의 업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은..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 이긴 하다.

한 3개월정도 해당 프로그램 유지보수를 하면서, 대학교때 잠시 Visual Studio로 그림그리기 하던 MFC 손좀 데보고, 쌩판 해보지도 못했던 Pro*C 수정 및 컴파일, 배포, 그리고 여러 DB 툴을 가지고 전군에서 취합한 데이터를 SQL 공부하면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을때, 모 중령님의 좌천(?) 소식을 듣게 되었다. A 프로그램때문에 그렇게 된건 아니겠지만, 여러가지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겠지.. 그리고서는 강중령님이라는 분이 내 새 파트너로 오시게 되었다. 이 분 역시 전산쪽에는 깊은 지식은 없으셨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시는 분 이였지만, 모 중령님과 다른 중요한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경청하는 자세였다.

일개 병사였던 나의 이야기를 이분은 차근 차근 들어 주셨다.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이 문제였는지, 이 프로그램을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 하나씩 풀어 나가셨다. 내가 강중령님께 제안을 했던 것은 크게 3가지 였다. 첫번째, 현재 DB가 Informix로 되어 있는데  Oracle 로 변경하는 것이 좋겠다. Informix를 쓰는 것은 목적지를 도착하기 위한 지름길이 있는데 돌아가는 격이다 라고 설명했었다. 두번째, 데이터 가공을 위해 Pro*C 를 사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상대적으로 리소스가 충분한 Oracle 서버에서 돌수 있는 PL/SQL(Stored Procedure, SP)로 변경하자. 세번째, 그 당시 유상으로 구매했던 JBuilder의 기능이 현재 프로그램 개발하는데 좋은 기능들이 많다. MFC는 버리고 Java 기반으로 가자..

회사로 따지만 입사 1년차에 어떻게 이런 제안을 했었는지 지금 생각 해보니 대단한 것 같기도 한다. 내 제안은 대부분 앞으로 내 경력을 쌓아가기 위해 전략적(?)으로 제시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나에게는 잘 알지도 못 하는 것을 억지로 배워가면서까지 개발할 여력도 없었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셨던 강대령님은 나의 제안을 모두 수용해주셨다. 해서 수 년 동안 애물단지로 취급받던 프로그램을 새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 가지 유의했던 점은, 기존에 있던 프로그램을 그대로 마이그레이션 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테이블 구성이라던지 비즈니스 로직 자체에 비효율적인 부분이 무척 많았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가령, 군수 물자에는 종류가 분류되어 있고, 어떤 종은 전시 피해 상황시 계산할 필요가 없는 종도 있다.(자세히는 말하지 않겠다.) 헌데, 기존 프로그램 볼 필요도 없는 종 때문에 계산하는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였다. 전쟁 시나리오를 넣고 계산 버튼을 누르면, 답이 나오기까지는 꼬박 2박 3일이 소요 되었다. 이런 프로그램은 최소한 반나절에 한번 이상씩 데이터 기반으로 보고를 해야 되는 훈련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약 7개월동안 강중령님께 말씀 드린 모든 약속들을 충실히 이행해 나갔다. Oracle 기반의 데이터 테이블 구조를 만들고, 일반적인 정규화를 바탕으로 관계형 데이터베이스에 충실한 데이터 모델을 만들어 냈다.(그때 당시에는 같은 데이터가 여러개 테이블에 분산되어 있으면 죄악으로 삼던 시절인 듯..ㅡㅡ) 잘 알지도 못하는 SP 작성을 위해 오라클사에서 제공한 복사본 매뉴얼을 옆에 끼고 살았다.  그때 버전이 9i 였고, 이 과정이 무척 재미 있었다. 그리고 모든 UI는 JAVA기반으로 변경했고, JBuilder 컴포넌트도 다수 사용했었다.

SP 작업시 기억이 나는 작업이 하나 있다. 육본은 냉방이 잘되는 건물이지만, 주말 혹은 퇴근 시간 이후에는 냉방이 되지 않는다. 비즈니스 로직을 전혀 모르고 있던 나는, 프로시저를 제대로 작성하기 위해서 강중령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 했다. 물론, 서로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여름이였다. 정말 무더운 여름에 중령님과 나는 텅빈 사무실에 앉아 함께 작업을 했고, 옷에 있어서는 격식 차리지 말자는 말씀에 속옷만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천줄 정도 되는 프로시저를 검토하곤 했었다. 지금 짜면 그렇게 안 짜겠지..ㅡㅡㅋ 프로시저 전체를 글자 줄여서 출력한 다음 테이프로 붙이면 길이가 꽤 되었다. 그걸 앞에 벽에 붙여 놓고 한 줄 한 줄 훑어 나가면서 잘 못 된 부분이 있는 지 없는 지 검토 했었다. 쉽지 않은 작업이였지만.. 난 그 순간이 지금도 힘들때면 기억을 하는 좋은 기억이다.

이렇게 만든 프로그램은 7개월안에 모습이 들어났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산정 시간은 기존 2박 3일의 시간이 13시간으로 단축하게 되었다. 프로시저 중간 중간에 로그성 구문을 집어넣어 커밋 갯수와 루프를 튜닝하고 나니 최종적으로 4시간 30분으로 단축이 되었고, 이 프로그램은 전시 훈련시에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실제로 훈련상황을 모니터링하는 대형화면에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 한 켠을 차지하게 되었고, 결과물은 신뢰도가 무척 높았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들을 생각해보니, 강중령님과 나, 그리고 주사님 한분, UI 를 그려주었던 후임이 투입되었었다. 그리고 상병쯤에 해당 프로젝트의 성과를 인정받아 군수참모부 표창장(2스타)을 받게 되었다.

그때 당시에는 군에서 수행하는 프로젝트가 별거 아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밖에 나오면 제대로 된 환경에서 더 큰 프로젝트를 수행하겠지 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꽤 규모도 컸고, 나름 체계적이였었다. 그리고 첫 프로젝트가 대량 데이터를 가공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용량 데이터베이스, 처리속도 등을 고민하게 되었었고, 이후 대부분의 경험들이 대용량 데이터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해주었고, 잘 수행하게 해준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진듯 하다. 두 번째 프로젝트와 기타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다음 글에 남기도록 하겠다. 오늘도 쓰다 보니 무척 길어지는 듯..ㅋ 하지만 더 잊혀지기 전에 꼭 정리해보고 싶다. 참고로 함께 근무했던 선후임들은 대부분 이름있는 회사에서 기량을 뽐내고 있음..ㅋ 자랑스러운 친구들이다.

To be continued..

>_



-- My Story ---------------------------------------










---------------------------------------------------

2014년 4월 27일 일요일

학생시절 경험한 프로그래밍

나는 어렸을때 부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는 아니였다.
(와이프가 와서 태클 겁니다. 다들 그렇다고..ㅡㅡㅋ)

초등학교 3,4 학년쯤(90년대 초반), 어머님께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학원에 보내주셨던 것도 기억한다. 조그마한 상가의 3층에 한켠의 방처럼 생긴 학원에 들어서면, 컴퓨터가 여러대 놓여 있는 방이 있었고, 내 기억으로는 검은 스크린에 초록색 글자로 더하기, 빼기 같은 걸 했던 듯 싶다. 아마도 Basic이였겠지.. 헌데, 그리 관심은 많지 않았었고, 학원도 오래 다니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처럼 코딩 조금 하면 웹 브라우저나 스마트폰으로 멋진 화면들을 볼 수 있었다면, 어린 시절에라도 눈에 확 들어올 수도 있었을 텐데.. 친구들과 뛰어 놀거나, 오락실에서 오락하는 걸 즐겨 했던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었다.

중학교 시절(90년대 중반)에는 삐삐가 유행했었다. 부모님 몰래 삐삐를 구해서 친구들과 번호로 장난치다가 걸린게 한 두 번이 아닌 듯.. 한번은 삐삐에서 버튼을 누르면 현재 시간을 음성으로 알려주는 검은색 기계를 들고 다녔었는데, 어머님 앞에서 버튼이 실수로 눌러져 "지금은 몇 시 몇 분 입니다." 라는 여자 음성이 흘러 나온 걸 들으시고 놀라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새로 산 시계에요." 하고 말도 안 되게 얼버무렸었다..ㅋ 이 시점에는 전화선을 모뎀에 연결하여 컴퓨터 통신을 하던 시절이다. 천리안, 나우누리와 같은 곳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채팅 하던게 낙이였던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 듯 싶다. 삐삐를 받으면, 근처 공중전화나 집 전화기로 전화를 걸면 한시간 넘게 통화가 되지 않는 집은, 분명 모뎀으로 컴퓨터 통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 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걸로 전화요금 폭탄 맞는 경우도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90년대 후반)에는 각 집마다 PC를 구매 하는 비율이 점점 올라간 듯 싶다. 특히, 스타크래프트가 나오면서, 학교 근처에 PC방들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농구, 축구, 당구에 빠져 있던 애들이 전부 PC방으로 몰렸었다. 나는 수능보기 전에 게임에 빠지는 게 두려워 친구들과 스타를 하기 보다는 당구장(응?)에 살다 시피 했었던 듯..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는 집에 컴퓨터가 없었다.

대학교 입학시 전공을 고민하던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공학도가 되고 싶었고, 그나마 가장 관심이 많았던.. 아니.. 관심보다는 조금이라도 일상생활에 접해 봤었던 컴퓨터 관련 전공을 하고 싶었고, 수능 점수에 맞는 서울내 4년제 대학교 중 컴퓨터공학과가 있었던 대학의 공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580명인가 되었던 공학부의 내 전공은 3학년때 정해지는 거였지만, 주 전공 필수 강의를 2학년부터는 들어야 했기 때문에 1년만에 희망 전공을 정해야 했고, 그 당시 내 선배들은 컴공이 아니라 식품공학과였다. 공학부이다 보니, 선배를 정할 때 이름순으로 580명을 펼쳐 넣고, 40명씩 반을 잘라 A ~ O반까지 나눠서 A,B 반은 컴공이 선배.. 이런식으로 선배를 배정 받았었다. 난, 조씨 성 덕분에 M반에 속했었고, 지금도 만나는 내 대학동기들은 모두 성이 조씨, 최씨, 황씨 등이다..ㅋㅋ (이런 방식의 입학 방식은 바로 폐지되었음..ㅡㅡㅋ) 여튼, 대학생 초반에는 컴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관련 공부를 하기 쉽지 않았었고, 열심히 동아리 생활을 했던 나에게 학부 생활은 그리 즐겁지 많은 아니였다. 관심있는 동기, 선배들과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군대를 가기위해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학부 생활보다는 동아리 생활에 치중했던 나는 학점이 엉망이였다. 부끄럽지만, 4개 학기 평균 학점이 4.5점 만점에 2점대를 넘기지 못 했었다.ㅡㅡㅋ 군입대까지 시간이 남아서 PC방, 당구장, 호프집 같은데에서 알바를 하며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헌데, 어느 날.. 아무것도 준비 못 하고 군대를 가서 2년 삽질 하고 와야 하는게 억울했고, 불안했다. 해서, 멋도 모르고 컴공으로 졸업하여 관련 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방위산업체에서 프로그래머로 근무를 해야 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안고, 복학을 하였다.(실은, 집안 사정상 군대를 가기 힘든 것도 있었다.)

군대를 갔다 온 건 아니였지만, 일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 코딩 능력을 어떻게든 올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강남의 모 컴퓨터학원에서 강의를 듣기도 하였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대신, 학교에서 프로그래밍 관련 강의는 다 듣기 시작했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당시(2000년대 초반) Java관련된 과목이 하나밖에 없어서 맘 맞는 선,후배들과 함께 스터디를 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실력이 늘었다기 보다는 프로그래밍에 대해서 나름 철학을 가지고 있던 선,후배들과 코딩을 함께 해 가면서 재미와 분위기를 익혔던 걸로 기억 한다. 솔직히 후배들보다 훨씬 못 하고 있어서 쪽 팔려서 더 노력했던 듯..대학 강의 과정에서 했던 프로젝트는 대부분 네트워크 관련된 프로젝트 였다. 채팅 프로그램, FTP 프로그램, MFC 기반의 C/S 프로그램 등 이였다. Copy & Paste 를 미친듯이 했었었고 내 머리속에서 나온 코딩은 몇 줄 안되었지만, 재미를 느꼈었고, 여러 밤을 쉽게 세곤 했었다. 한번은 PC방에서 FTP 프로그램 관련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PC방 주인이 옆자리에 앉더니 머 하냐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 본적도 있었다. 아마, PC에 머 이상한 작업 하는 걸로 오해 한 듯 싶다..ㅋ

4학년 졸업이 다가오면서 방산업체를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었다. 헌데, 아쉽게도 정부에서는 병역특례 인력을 줄인다고 정책을 바꿨고, 심지어는 두 자리수로 줄어 들어 대부분은 이미 입사하여 T/O를 기다리고 있는 내정자들에게 돌아가는 실정이였다. 나는 병무청에서 그해 방위산업체로 T/O를 배정받은 전체 업체의 리스트를 확보하였고, 전체 업체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메일 주소가 있는 곳에는 메일을 보냈고, 것도 없으면 일일히 전화를 걸었다. 몇 군데에서는 면접을 보자고 했었고, 모 대학교 안의 산학연으로 들어가 있던 업체도 있었다. 정확이 어딘지 기억이 안나지만, 기차타고 남해 어딘가 가서 바다가 보이던 대학 캠퍼스 안에서 면접을 봤던 기억이 난다. 면접관이 물어봤다. "입사하면 어떻게 일을 할 것이냐" 답은 별거 없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다시 묻더라. "어떻게 최선을 다할 것이냐" ㅋ.. 지금 생각 해보니 딱히 내세울만한 기술이 없었던 나에게 일자리를 줄 업체는 없었던 듯 싶다. 그때 만약 학교에서 데이터베이스의 테이블 만드는 방법과 SQL 활용법, 웹어플리케이션 작성 및 WAS사용법 같은 것을 가르쳤다면, 쉽게 입사 할 수 있었을 듯..ㅡㅡㅋ

결국, 난 병역특례 업체를 구하지 못 했고, 군대를 가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 한 상황이였으니 여러가지 옵션이 있었다. 학사 장교도 있고, 걍 병사로 가도 되고.. 처음엔 나이 먹고 병사로 가기는 쪽 팔려서 공군 학사 장교 시험도 봤었다. 공군으로 본 이유는 그 당시 내 동생이 공군으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이유 밖에 없었던 듯.. 그 시험은 내가 지금까지 본 시험 중에 제일 어려웠던 시험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보기 좋게 떨어지고 다시 고민 해 보았다. 내 전공을 살리면서 군 생활을 짧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때 우연히 알게 되었던 핵심 기술 특화병 중 하나였던, SW개발병.. 이력서를 준비해서 병무청에 제출하고, 서류 면접이 통과한 인력에 한해서 면접을 수행했다. 그 당시 육군전산소의 대위님이 면접관으로 오셨고, 나에게 이것 저것 물어 봤었다. 그때 기억이.. JSP 해본적 있냐, 요거만 기억 난다. 다행히 Java 공부하면서 해 본게 있어서 할 수 있다고 답했었다. 실은, 컴공을 졸업한 사람이 정보처리기사 자격증과 함께, 육군 병사로 지원 하는 것 만 해도 큰 가산점이였다. 해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4월에 이등병으로 논산 훈련소에 입소 하였다. 그리고 6주 훈련후, 배치 받은 부대는 바로 계룡대 육군전산소, 여러 부서중에 군수참모부의 군수소요과 관련 업무를 진행하는 곳에서 군생활이자 군SI 업무를 처음 수행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순간 전 까지만 하더라도, 컴퓨터공학을 전공하였지만, 이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짙었던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미래가 불투명하던 아이였다. 대학은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음악 동아리 생활만 열심히 하면서 설렁 설렁 다녔고, 막판 2년동안 계절학기 3번을 강행하면서 겨우 대기업 커트라인에 부합하는 학점을 만들어낸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학점이라던지 학부생활의 충실도가 나중에 직장생활이후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가령,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는 녀석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자기가 관심있는 악기를 자기 돈으로 사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가며 연습을 해서, 개성 뚜렷한 다른 녀석들과 합주를 하는 재미로 대학 생활을 즐긴다. 이 모습은 프로그래머들이 본인이 원하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선택하여 연마하고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서 협업을 통해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무척 닮았다. 실리콘 밸리의 근무 환경이 좋기로 소문난 회사에 가보면, 방음이 잘 되어 있고 투명한 벽으로 둘러 쌓인 합주실을 본적이 있다. 아마도 이런 연관관계가 주된 이유가 아닐까..  

나는 나의 IT 인생의 시작은 대학을 졸업하고 SW개발병으로 복무를 시작하는 순간 부터라고 생각한다. 이때 겪었던 프로젝트나 보안관제 근무를 섰던 모니터링 실, 서버실, 거기서 작업하던 크고 작은 업체 분들과의 만남 등은 나의 업을 정하고 시작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SW개발병 생활은 다음 글 부터 쓰겠다.

복무시절 병무청 홈페이지에 핵심기술특화병 홍보를 위해 찍어 간 사진이 있다. 헌데, 그게 아직도 있다. SW관리병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특기 번호도 바뀐듯..한번 웃자는 뜻에서..링크 공유한다..:)




>_


-- My Story ---------------------------------------










---------------------------------------------------


2014년 4월 19일 토요일

미국에서의 어린시절, 그리고 내 생애 최초의 컴퓨터

어린시절, 나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선발된 미국 박사과정 수행 가능인력(?)으로 선정되셨다.

요즘 같으면 학비까지 모두 지원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알고 보니 학비 지원은 전혀 없었다고 하셨다. 


해서, 아버지는 장학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미국내 대학교를 수소문하고 지원하셔서 두어군데에서 응답을 받으셨고, 조교 역할을 하면 전액 장학금을 제공 받을 수 있는 모 주립대학교로 학교를 결정하시게 되었다.


80년 초반에 영어는 한국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던 부모님은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셨고, 만 5년만에 박사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밟으셨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대단한 모험이지 않았나 싶다.


덕분에 나는 한국나이로 3살부터 8살때까지, 5년간 미국 본토에서 생활 할 수 있었었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영어를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만 6세 생일 파티 인 듯.. 얘네들 다 어딨을까..ㅋ)

그렇다고 지금 영어를 native처럼 구사하는 건 아니다. 실은 귀국 한 뒤 한국말이 서투른 상태에서 초등학교(그 당시 국민학교) 1학년 다니는 것이 힘들어 한국어 학원을 다녔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엄청난 언어 습득력으로 인해 6개월만에 유창하던 영어를 거의 다 잊어 버렸다고 하더라..


하나의 에피소드가.. 귀국후 1년정도 있다가 외할아버님 환갑잔치때 만났던 사촌형이 영어로 무언가를 물어봤는데, 나와 내 동생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이렇게 물어봤다고 한다.

"형, 머라고 말 하는 거야?"

그 이후로 사회 생활할 때까지 영어를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었고, 학창시절에 영어 점수가 빼어나게 좋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누군가 영어로 말하면 알아 듣는 수준이라던지, 발음은 무척 좋은 편에 속했었다.하지만, 입사할때 생각해보니 대기업 토잌 커트라인을 넘기기 위해서 고군분투 했었고, 입사 지원시 자기소개서에는 미국에 살았었다는 부분을 쓰지 않았었다. 혹시나 면접관이 그 내용을 보고 영어를 시킬까봐 두려웠었던 듯 싶다. 그 만큼, 난 영어에 자신이 없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학창시절에 배운 영어는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을 몸소 체험했다. 추후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우연히 글로벌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미국, 벨라루스, 독일, 인도 등의 엔지니어들과 일을 함께 하다 보니, 물 밑에 가라 앉아 있던 영어 능력이 무서운 속도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이 내용은 나중에 자세히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미국 생활할 당시 우리 집에 컴퓨터가 한 대 있었다. 내 생애 첫 컴퓨터이다. 솔직히 정확한 모델이 머였는지, 그 컴퓨터로 멀 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그저 플로피 디스크통에 들어 있는 게임 같은 것을 가끔 했던 걸로 기억한다.





(책상위에서 놀던 동생과 나, 책상위에는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 키보드가 있었었다.)

울 어머니는 이 컴퓨터의 존재를 거의 기억 못 하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이 컴퓨터를 가지고 논 기억이 무척 또렸하다. 한국에 가지고 와서는 안에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드라이버로 뜯어 보려고 했던 것도 기억 한다. 헌데, 지금 컴퓨터와는 다르게 납땜이 되어 있어서 속을 들여다 보려면, 철판을 뜯어내야 했었다. 해서, 결국 포기했었고, 어는 날엔가 고철덩어리가 되어서 사라진 듯 하다. 계속 가지고 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아쉽다.

이 컴퓨터 모델을 기억하고 싶은데, 어렴풋이 대우가 영어로 적혀 있었던듯..(DAEWOO) 미국에서 대우전자가 수출(?)한 제품을 사지 않았나 싶다. 싸이트 뒤져 봤는데, 도저히 못 찾겠다. 아무래도 81년도에 판매된 IBM PC와 대충 스펙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모르지.. 한참 떨어질지도..

http://oldcomputers.net/ibm5150.html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길 좋아했고, 늘 밝은 편이였으며, 감정에 솔직하게 커 왔고, 지금도 그렇다. 일하는 방식도,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것 보다는 항상 새로운 일을 찾아서 challanging하는 것을 즐기며, 새로운 것을 배워서 실무에 적용하는 것을 무척이나 원하고 바랜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에서의 생활이 단순히 영어가 늘었다는 것 보다는, 한국에 비해서 무척이나 자유로운 서구문화에 대한 경험이 내 자신의 생각의 틀을 넓히게 해주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피부색이 다른 친구들을 만날때 어색함 보다는 설레임이 가득한 나에게,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 또한 나에게는 글로벌 엔지니어로 성장 하기 위한 강력한 자양분이 된다는 것에 무척 감사해 하고 있다.



(Elementary School 같은 반 친구들.. 서있는 애들 중, 우측 끝이 나다..) 


2013년 6월, 멕시코 티후아나의 생산법인 시스템 구축을 위해 2개월정도 출장을 다녀온적이 있었다. 그때, 보안문제로 근접한 미국 샌디에고의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었다. 샌디에고에 도착한 첫 날,  26년만에 다시 밟은 미국땅은 너무나도 포근했다. 이상하리만큼, 익숙했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 난 꿈을 꾸고 있다. 미국땅에서 대한민국의 IT 엔지니어로서 활약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나에게 주셨던 경험을, 내 자식에게도 해주고 싶다.

나의 꿈은.. 진행형이다!!

>_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대한민국 SW 개발자 생활 10년을 돌아보며..

2004년 4월 16일..

내가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첫 날이다..

그날은..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늦게 나마 군대에 입대한 날이다..

나의 SW개발자 인생은 조금은 특이하게 시작하였다..

4년제 대학교 컴퓨터 공학을 졸업하고 '과연 이걸로 밥먹고 살 수 있을랑가' 하는 막연한 마음속에서..

국방의 의무를 효율(?)적으로 다하고자 핵심기술특화병인 'SW개발병'으로 입대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듯 하다..

머..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하기로 하고..

만 10년이 된 지금, 무언가 새롭게 시작 혹은 무언가 값진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어떤것이 좋을까..

해서 오랜 시간(?) 끝에 결심한게 '블로그' 이다.

어디선가 SW개발자에게 블로깅은 필수라고 했던 글을 본 듯 하기도 한데.. 솔직히 시간을 내서 의미있는 글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었다.. 허나..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가면서, 고민하고 나누고 싶은 내용들을 블로그에 담아보고자 한다.

처음부터 무거운 주제로 시작하기에는 겁이 날 듯 해서리..

내가 그 동안 지나온 발자취를 한번 천천히 정리해 나가보고자 한다..

이유는..

첫째.. 나 자신을 돌아보고 또 다른 10년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함이다.

둘째.. 이공계 기피현상(?)과 특히 IT 관련 업은 3D 업종으로 생각하며 거들떠도 보지 않는 우리 젊은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내 업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해주고 싶고, 도전해보고 싶은 후배들에게 평범한 대한민국 개발자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기 위함이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거만해 보일 수도 있을 터인데, 저는 무척 평범하고 능력도 적당한 인간이기에 오히려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ㅡㅡㅋ)

셋째.. 그 동안 국내의 외국인들과 일하면서 느낀 감정 및 현실을 토대로, 대한민국 IT의 글로벌화에 조금이나마 기여 할 수 있는 글들을 써보고 싶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글들은 일기 형태로 풀어 나갈 생각이다.. 한 주에 한 개씩 써 나가봐야지..

현재 생각하는 콘텐츠는..

. 어린시절의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에 대한 경험

. 대학시절 컴퓨터 공학과 학생으로서의 삶

. SW개발병으로 입대하게 되는 과정

. 육군전산소에서 개발자로서의 프로젝트 이야기 - part 1,2

. 사회 생활 시작을 위한 준비 및  최초 SI  업체 진출기

. 두번째 SI 업체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기

. 사원때 초보아닌 초보 개발자로써의 프로젝트 방황기

. Framework 개발자 진입기

. 개발자 및 SA로써 수행한 대형 보험사 차세대 프로젝트 수행기

. SA/FA로써 수행한 대형 제조사 글로벌 프로젝트 수행기

. 내 개인 브랜드에 대한 고민 및 이직기

머.. 중간 중간에 조금씩 수정 될 수는 있겠지만.. 이런 형태로 진행 해 볼까 한다..

그럼.. 시작해 볼까?

>_



-- My Story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