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으면 학비까지 모두 지원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알고 보니 학비 지원은 전혀 없었다고 하셨다.
해서, 아버지는 장학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미국내 대학교를 수소문하고 지원하셔서 두어군데에서 응답을 받으셨고, 조교 역할을 하면 전액 장학금을 제공 받을 수 있는 모 주립대학교로 학교를 결정하시게 되었다.
80년 초반에 영어는 한국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던 부모님은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셨고, 만 5년만에 박사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밟으셨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대단한 모험이지 않았나 싶다.
덕분에 나는 한국나이로 3살부터 8살때까지, 5년간 미국 본토에서 생활 할 수 있었었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영어를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만 6세 생일 파티 인 듯.. 얘네들 다 어딨을까..ㅋ)
그렇다고 지금 영어를 native처럼 구사하는 건 아니다. 실은 귀국 한 뒤 한국말이 서투른 상태에서 초등학교(그 당시 국민학교) 1학년 다니는 것이 힘들어 한국어 학원을 다녔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엄청난 언어 습득력으로 인해 6개월만에 유창하던 영어를 거의 다 잊어 버렸다고 하더라..
하나의 에피소드가.. 귀국후 1년정도 있다가 외할아버님 환갑잔치때 만났던 사촌형이 영어로 무언가를 물어봤는데, 나와 내 동생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이렇게 물어봤다고 한다.
"형, 머라고 말 하는 거야?"
그 이후로 사회 생활할 때까지 영어를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었고, 학창시절에 영어 점수가 빼어나게 좋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누군가 영어로 말하면 알아 듣는 수준이라던지, 발음은 무척 좋은 편에 속했었다.하지만, 입사할때 생각해보니 대기업 토잌 커트라인을 넘기기 위해서 고군분투 했었고, 입사 지원시 자기소개서에는 미국에 살았었다는 부분을 쓰지 않았었다. 혹시나 면접관이 그 내용을 보고 영어를 시킬까봐 두려웠었던 듯 싶다. 그 만큼, 난 영어에 자신이 없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학창시절에 배운 영어는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을 몸소 체험했다. 추후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우연히 글로벌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미국, 벨라루스, 독일, 인도 등의 엔지니어들과 일을 함께 하다 보니, 물 밑에 가라 앉아 있던 영어 능력이 무서운 속도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이 내용은 나중에 자세히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미국 생활할 당시 우리 집에 컴퓨터가 한 대 있었다. 내 생애 첫 컴퓨터이다. 솔직히 정확한 모델이 머였는지, 그 컴퓨터로 멀 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그저 플로피 디스크통에 들어 있는 게임 같은 것을 가끔 했던 걸로 기억한다.
(책상위에서 놀던 동생과 나, 책상위에는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 키보드가 있었었다.)
울 어머니는 이 컴퓨터의 존재를 거의 기억 못 하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이 컴퓨터를 가지고 논 기억이 무척 또렸하다. 한국에 가지고 와서는 안에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드라이버로 뜯어 보려고 했던 것도 기억 한다. 헌데, 지금 컴퓨터와는 다르게 납땜이 되어 있어서 속을 들여다 보려면, 철판을 뜯어내야 했었다. 해서, 결국 포기했었고, 어는 날엔가 고철덩어리가 되어서 사라진 듯 하다. 계속 가지고 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아쉽다.
이 컴퓨터 모델을 기억하고 싶은데, 어렴풋이 대우가 영어로 적혀 있었던듯..(DAEWOO) 미국에서 대우전자가 수출(?)한 제품을 사지 않았나 싶다. 싸이트 뒤져 봤는데, 도저히 못 찾겠다. 아무래도 81년도에 판매된 IBM PC와 대충 스펙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모르지.. 한참 떨어질지도..
http://oldcomputers.net/ibm5150.html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길 좋아했고, 늘 밝은 편이였으며, 감정에 솔직하게 커 왔고, 지금도 그렇다. 일하는 방식도,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것 보다는 항상 새로운 일을 찾아서 challanging하는 것을 즐기며, 새로운 것을 배워서 실무에 적용하는 것을 무척이나 원하고 바랜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에서의 생활이 단순히 영어가 늘었다는 것 보다는, 한국에 비해서 무척이나 자유로운 서구문화에 대한 경험이 내 자신의 생각의 틀을 넓히게 해주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피부색이 다른 친구들을 만날때 어색함 보다는 설레임이 가득한 나에게,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 또한 나에게는 글로벌 엔지니어로 성장 하기 위한 강력한 자양분이 된다는 것에 무척 감사해 하고 있다.
2013년 6월, 멕시코 티후아나의 생산법인 시스템 구축을 위해 2개월정도 출장을 다녀온적이 있었다. 그때, 보안문제로 근접한 미국 샌디에고의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었다. 샌디에고에 도착한 첫 날, 26년만에 다시 밟은 미국땅은 너무나도 포근했다. 이상하리만큼, 익숙했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 난 꿈을 꾸고 있다. 미국땅에서 대한민국의 IT 엔지니어로서 활약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나에게 주셨던 경험을, 내 자식에게도 해주고 싶다.
나의 꿈은..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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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컴퓨터 모델을 기억하고 싶은데, 어렴풋이 대우가 영어로 적혀 있었던듯..(DAEWOO) 미국에서 대우전자가 수출(?)한 제품을 사지 않았나 싶다. 싸이트 뒤져 봤는데, 도저히 못 찾겠다. 아무래도 81년도에 판매된 IBM PC와 대충 스펙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모르지.. 한참 떨어질지도..
http://oldcomputers.net/ibm5150.html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길 좋아했고, 늘 밝은 편이였으며, 감정에 솔직하게 커 왔고, 지금도 그렇다. 일하는 방식도,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것 보다는 항상 새로운 일을 찾아서 challanging하는 것을 즐기며, 새로운 것을 배워서 실무에 적용하는 것을 무척이나 원하고 바랜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에서의 생활이 단순히 영어가 늘었다는 것 보다는, 한국에 비해서 무척이나 자유로운 서구문화에 대한 경험이 내 자신의 생각의 틀을 넓히게 해주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피부색이 다른 친구들을 만날때 어색함 보다는 설레임이 가득한 나에게,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 또한 나에게는 글로벌 엔지니어로 성장 하기 위한 강력한 자양분이 된다는 것에 무척 감사해 하고 있다.
(Elementary School 같은 반 친구들.. 서있는 애들 중, 우측 끝이 나다..)
2013년 6월, 멕시코 티후아나의 생산법인 시스템 구축을 위해 2개월정도 출장을 다녀온적이 있었다. 그때, 보안문제로 근접한 미국 샌디에고의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었다. 샌디에고에 도착한 첫 날, 26년만에 다시 밟은 미국땅은 너무나도 포근했다. 이상하리만큼, 익숙했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 난 꿈을 꾸고 있다. 미국땅에서 대한민국의 IT 엔지니어로서 활약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나에게 주셨던 경험을, 내 자식에게도 해주고 싶다.
나의 꿈은..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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