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2014년 4월 27일 일요일

학생시절 경험한 프로그래밍

나는 어렸을때 부터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는 아니였다.
(와이프가 와서 태클 겁니다. 다들 그렇다고..ㅡㅡㅋ)

초등학교 3,4 학년쯤(90년대 초반), 어머님께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학원에 보내주셨던 것도 기억한다. 조그마한 상가의 3층에 한켠의 방처럼 생긴 학원에 들어서면, 컴퓨터가 여러대 놓여 있는 방이 있었고, 내 기억으로는 검은 스크린에 초록색 글자로 더하기, 빼기 같은 걸 했던 듯 싶다. 아마도 Basic이였겠지.. 헌데, 그리 관심은 많지 않았었고, 학원도 오래 다니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처럼 코딩 조금 하면 웹 브라우저나 스마트폰으로 멋진 화면들을 볼 수 있었다면, 어린 시절에라도 눈에 확 들어올 수도 있었을 텐데.. 친구들과 뛰어 놀거나, 오락실에서 오락하는 걸 즐겨 했던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었다.

중학교 시절(90년대 중반)에는 삐삐가 유행했었다. 부모님 몰래 삐삐를 구해서 친구들과 번호로 장난치다가 걸린게 한 두 번이 아닌 듯.. 한번은 삐삐에서 버튼을 누르면 현재 시간을 음성으로 알려주는 검은색 기계를 들고 다녔었는데, 어머님 앞에서 버튼이 실수로 눌러져 "지금은 몇 시 몇 분 입니다." 라는 여자 음성이 흘러 나온 걸 들으시고 놀라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새로 산 시계에요." 하고 말도 안 되게 얼버무렸었다..ㅋ 이 시점에는 전화선을 모뎀에 연결하여 컴퓨터 통신을 하던 시절이다. 천리안, 나우누리와 같은 곳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채팅 하던게 낙이였던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 듯 싶다. 삐삐를 받으면, 근처 공중전화나 집 전화기로 전화를 걸면 한시간 넘게 통화가 되지 않는 집은, 분명 모뎀으로 컴퓨터 통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 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걸로 전화요금 폭탄 맞는 경우도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90년대 후반)에는 각 집마다 PC를 구매 하는 비율이 점점 올라간 듯 싶다. 특히, 스타크래프트가 나오면서, 학교 근처에 PC방들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농구, 축구, 당구에 빠져 있던 애들이 전부 PC방으로 몰렸었다. 나는 수능보기 전에 게임에 빠지는 게 두려워 친구들과 스타를 하기 보다는 당구장(응?)에 살다 시피 했었던 듯..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는 집에 컴퓨터가 없었다.

대학교 입학시 전공을 고민하던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공학도가 되고 싶었고, 그나마 가장 관심이 많았던.. 아니.. 관심보다는 조금이라도 일상생활에 접해 봤었던 컴퓨터 관련 전공을 하고 싶었고, 수능 점수에 맞는 서울내 4년제 대학교 중 컴퓨터공학과가 있었던 대학의 공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580명인가 되었던 공학부의 내 전공은 3학년때 정해지는 거였지만, 주 전공 필수 강의를 2학년부터는 들어야 했기 때문에 1년만에 희망 전공을 정해야 했고, 그 당시 내 선배들은 컴공이 아니라 식품공학과였다. 공학부이다 보니, 선배를 정할 때 이름순으로 580명을 펼쳐 넣고, 40명씩 반을 잘라 A ~ O반까지 나눠서 A,B 반은 컴공이 선배.. 이런식으로 선배를 배정 받았었다. 난, 조씨 성 덕분에 M반에 속했었고, 지금도 만나는 내 대학동기들은 모두 성이 조씨, 최씨, 황씨 등이다..ㅋㅋ (이런 방식의 입학 방식은 바로 폐지되었음..ㅡㅡㅋ) 여튼, 대학생 초반에는 컴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관련 공부를 하기 쉽지 않았었고, 열심히 동아리 생활을 했던 나에게 학부 생활은 그리 즐겁지 많은 아니였다. 관심있는 동기, 선배들과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군대를 가기위해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학부 생활보다는 동아리 생활에 치중했던 나는 학점이 엉망이였다. 부끄럽지만, 4개 학기 평균 학점이 4.5점 만점에 2점대를 넘기지 못 했었다.ㅡㅡㅋ 군입대까지 시간이 남아서 PC방, 당구장, 호프집 같은데에서 알바를 하며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헌데, 어느 날.. 아무것도 준비 못 하고 군대를 가서 2년 삽질 하고 와야 하는게 억울했고, 불안했다. 해서, 멋도 모르고 컴공으로 졸업하여 관련 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방위산업체에서 프로그래머로 근무를 해야 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안고, 복학을 하였다.(실은, 집안 사정상 군대를 가기 힘든 것도 있었다.)

군대를 갔다 온 건 아니였지만, 일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 코딩 능력을 어떻게든 올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강남의 모 컴퓨터학원에서 강의를 듣기도 하였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대신, 학교에서 프로그래밍 관련 강의는 다 듣기 시작했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당시(2000년대 초반) Java관련된 과목이 하나밖에 없어서 맘 맞는 선,후배들과 함께 스터디를 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실력이 늘었다기 보다는 프로그래밍에 대해서 나름 철학을 가지고 있던 선,후배들과 코딩을 함께 해 가면서 재미와 분위기를 익혔던 걸로 기억 한다. 솔직히 후배들보다 훨씬 못 하고 있어서 쪽 팔려서 더 노력했던 듯..대학 강의 과정에서 했던 프로젝트는 대부분 네트워크 관련된 프로젝트 였다. 채팅 프로그램, FTP 프로그램, MFC 기반의 C/S 프로그램 등 이였다. Copy & Paste 를 미친듯이 했었었고 내 머리속에서 나온 코딩은 몇 줄 안되었지만, 재미를 느꼈었고, 여러 밤을 쉽게 세곤 했었다. 한번은 PC방에서 FTP 프로그램 관련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PC방 주인이 옆자리에 앉더니 머 하냐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 본적도 있었다. 아마, PC에 머 이상한 작업 하는 걸로 오해 한 듯 싶다..ㅋ

4학년 졸업이 다가오면서 방산업체를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었다. 헌데, 아쉽게도 정부에서는 병역특례 인력을 줄인다고 정책을 바꿨고, 심지어는 두 자리수로 줄어 들어 대부분은 이미 입사하여 T/O를 기다리고 있는 내정자들에게 돌아가는 실정이였다. 나는 병무청에서 그해 방위산업체로 T/O를 배정받은 전체 업체의 리스트를 확보하였고, 전체 업체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메일 주소가 있는 곳에는 메일을 보냈고, 것도 없으면 일일히 전화를 걸었다. 몇 군데에서는 면접을 보자고 했었고, 모 대학교 안의 산학연으로 들어가 있던 업체도 있었다. 정확이 어딘지 기억이 안나지만, 기차타고 남해 어딘가 가서 바다가 보이던 대학 캠퍼스 안에서 면접을 봤던 기억이 난다. 면접관이 물어봤다. "입사하면 어떻게 일을 할 것이냐" 답은 별거 없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다시 묻더라. "어떻게 최선을 다할 것이냐" ㅋ.. 지금 생각 해보니 딱히 내세울만한 기술이 없었던 나에게 일자리를 줄 업체는 없었던 듯 싶다. 그때 만약 학교에서 데이터베이스의 테이블 만드는 방법과 SQL 활용법, 웹어플리케이션 작성 및 WAS사용법 같은 것을 가르쳤다면, 쉽게 입사 할 수 있었을 듯..ㅡㅡㅋ

결국, 난 병역특례 업체를 구하지 못 했고, 군대를 가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 한 상황이였으니 여러가지 옵션이 있었다. 학사 장교도 있고, 걍 병사로 가도 되고.. 처음엔 나이 먹고 병사로 가기는 쪽 팔려서 공군 학사 장교 시험도 봤었다. 공군으로 본 이유는 그 당시 내 동생이 공군으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이유 밖에 없었던 듯.. 그 시험은 내가 지금까지 본 시험 중에 제일 어려웠던 시험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보기 좋게 떨어지고 다시 고민 해 보았다. 내 전공을 살리면서 군 생활을 짧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때 우연히 알게 되었던 핵심 기술 특화병 중 하나였던, SW개발병.. 이력서를 준비해서 병무청에 제출하고, 서류 면접이 통과한 인력에 한해서 면접을 수행했다. 그 당시 육군전산소의 대위님이 면접관으로 오셨고, 나에게 이것 저것 물어 봤었다. 그때 기억이.. JSP 해본적 있냐, 요거만 기억 난다. 다행히 Java 공부하면서 해 본게 있어서 할 수 있다고 답했었다. 실은, 컴공을 졸업한 사람이 정보처리기사 자격증과 함께, 육군 병사로 지원 하는 것 만 해도 큰 가산점이였다. 해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4월에 이등병으로 논산 훈련소에 입소 하였다. 그리고 6주 훈련후, 배치 받은 부대는 바로 계룡대 육군전산소, 여러 부서중에 군수참모부의 군수소요과 관련 업무를 진행하는 곳에서 군생활이자 군SI 업무를 처음 수행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순간 전 까지만 하더라도, 컴퓨터공학을 전공하였지만, 이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짙었던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미래가 불투명하던 아이였다. 대학은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음악 동아리 생활만 열심히 하면서 설렁 설렁 다녔고, 막판 2년동안 계절학기 3번을 강행하면서 겨우 대기업 커트라인에 부합하는 학점을 만들어낸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학점이라던지 학부생활의 충실도가 나중에 직장생활이후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가령,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는 녀석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자기가 관심있는 악기를 자기 돈으로 사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가며 연습을 해서, 개성 뚜렷한 다른 녀석들과 합주를 하는 재미로 대학 생활을 즐긴다. 이 모습은 프로그래머들이 본인이 원하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선택하여 연마하고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서 협업을 통해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무척 닮았다. 실리콘 밸리의 근무 환경이 좋기로 소문난 회사에 가보면, 방음이 잘 되어 있고 투명한 벽으로 둘러 쌓인 합주실을 본적이 있다. 아마도 이런 연관관계가 주된 이유가 아닐까..  

나는 나의 IT 인생의 시작은 대학을 졸업하고 SW개발병으로 복무를 시작하는 순간 부터라고 생각한다. 이때 겪었던 프로젝트나 보안관제 근무를 섰던 모니터링 실, 서버실, 거기서 작업하던 크고 작은 업체 분들과의 만남 등은 나의 업을 정하고 시작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SW개발병 생활은 다음 글 부터 쓰겠다.

복무시절 병무청 홈페이지에 핵심기술특화병 홍보를 위해 찍어 간 사진이 있다. 헌데, 그게 아직도 있다. SW관리병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특기 번호도 바뀐듯..한번 웃자는 뜻에서..링크 공유한다..:)




>_


-- My Story ---------------------------------------










---------------------------------------------------


2014년 4월 19일 토요일

미국에서의 어린시절, 그리고 내 생애 최초의 컴퓨터

어린시절, 나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선발된 미국 박사과정 수행 가능인력(?)으로 선정되셨다.

요즘 같으면 학비까지 모두 지원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알고 보니 학비 지원은 전혀 없었다고 하셨다. 


해서, 아버지는 장학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미국내 대학교를 수소문하고 지원하셔서 두어군데에서 응답을 받으셨고, 조교 역할을 하면 전액 장학금을 제공 받을 수 있는 모 주립대학교로 학교를 결정하시게 되었다.


80년 초반에 영어는 한국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던 부모님은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셨고, 만 5년만에 박사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밟으셨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대단한 모험이지 않았나 싶다.


덕분에 나는 한국나이로 3살부터 8살때까지, 5년간 미국 본토에서 생활 할 수 있었었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영어를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만 6세 생일 파티 인 듯.. 얘네들 다 어딨을까..ㅋ)

그렇다고 지금 영어를 native처럼 구사하는 건 아니다. 실은 귀국 한 뒤 한국말이 서투른 상태에서 초등학교(그 당시 국민학교) 1학년 다니는 것이 힘들어 한국어 학원을 다녔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엄청난 언어 습득력으로 인해 6개월만에 유창하던 영어를 거의 다 잊어 버렸다고 하더라..


하나의 에피소드가.. 귀국후 1년정도 있다가 외할아버님 환갑잔치때 만났던 사촌형이 영어로 무언가를 물어봤는데, 나와 내 동생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이렇게 물어봤다고 한다.

"형, 머라고 말 하는 거야?"

그 이후로 사회 생활할 때까지 영어를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었고, 학창시절에 영어 점수가 빼어나게 좋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누군가 영어로 말하면 알아 듣는 수준이라던지, 발음은 무척 좋은 편에 속했었다.하지만, 입사할때 생각해보니 대기업 토잌 커트라인을 넘기기 위해서 고군분투 했었고, 입사 지원시 자기소개서에는 미국에 살았었다는 부분을 쓰지 않았었다. 혹시나 면접관이 그 내용을 보고 영어를 시킬까봐 두려웠었던 듯 싶다. 그 만큼, 난 영어에 자신이 없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학창시절에 배운 영어는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을 몸소 체험했다. 추후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우연히 글로벌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미국, 벨라루스, 독일, 인도 등의 엔지니어들과 일을 함께 하다 보니, 물 밑에 가라 앉아 있던 영어 능력이 무서운 속도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이 내용은 나중에 자세히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미국 생활할 당시 우리 집에 컴퓨터가 한 대 있었다. 내 생애 첫 컴퓨터이다. 솔직히 정확한 모델이 머였는지, 그 컴퓨터로 멀 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그저 플로피 디스크통에 들어 있는 게임 같은 것을 가끔 했던 걸로 기억한다.





(책상위에서 놀던 동생과 나, 책상위에는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 키보드가 있었었다.)

울 어머니는 이 컴퓨터의 존재를 거의 기억 못 하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이 컴퓨터를 가지고 논 기억이 무척 또렸하다. 한국에 가지고 와서는 안에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드라이버로 뜯어 보려고 했던 것도 기억 한다. 헌데, 지금 컴퓨터와는 다르게 납땜이 되어 있어서 속을 들여다 보려면, 철판을 뜯어내야 했었다. 해서, 결국 포기했었고, 어는 날엔가 고철덩어리가 되어서 사라진 듯 하다. 계속 가지고 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아쉽다.

이 컴퓨터 모델을 기억하고 싶은데, 어렴풋이 대우가 영어로 적혀 있었던듯..(DAEWOO) 미국에서 대우전자가 수출(?)한 제품을 사지 않았나 싶다. 싸이트 뒤져 봤는데, 도저히 못 찾겠다. 아무래도 81년도에 판매된 IBM PC와 대충 스펙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모르지.. 한참 떨어질지도..

http://oldcomputers.net/ibm5150.html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길 좋아했고, 늘 밝은 편이였으며, 감정에 솔직하게 커 왔고, 지금도 그렇다. 일하는 방식도,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것 보다는 항상 새로운 일을 찾아서 challanging하는 것을 즐기며, 새로운 것을 배워서 실무에 적용하는 것을 무척이나 원하고 바랜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에서의 생활이 단순히 영어가 늘었다는 것 보다는, 한국에 비해서 무척이나 자유로운 서구문화에 대한 경험이 내 자신의 생각의 틀을 넓히게 해주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피부색이 다른 친구들을 만날때 어색함 보다는 설레임이 가득한 나에게,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 또한 나에게는 글로벌 엔지니어로 성장 하기 위한 강력한 자양분이 된다는 것에 무척 감사해 하고 있다.



(Elementary School 같은 반 친구들.. 서있는 애들 중, 우측 끝이 나다..) 


2013년 6월, 멕시코 티후아나의 생산법인 시스템 구축을 위해 2개월정도 출장을 다녀온적이 있었다. 그때, 보안문제로 근접한 미국 샌디에고의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었다. 샌디에고에 도착한 첫 날,  26년만에 다시 밟은 미국땅은 너무나도 포근했다. 이상하리만큼, 익숙했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 난 꿈을 꾸고 있다. 미국땅에서 대한민국의 IT 엔지니어로서 활약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나에게 주셨던 경험을, 내 자식에게도 해주고 싶다.

나의 꿈은.. 진행형이다!!

>_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대한민국 SW 개발자 생활 10년을 돌아보며..

2004년 4월 16일..

내가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첫 날이다..

그날은..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늦게 나마 군대에 입대한 날이다..

나의 SW개발자 인생은 조금은 특이하게 시작하였다..

4년제 대학교 컴퓨터 공학을 졸업하고 '과연 이걸로 밥먹고 살 수 있을랑가' 하는 막연한 마음속에서..

국방의 의무를 효율(?)적으로 다하고자 핵심기술특화병인 'SW개발병'으로 입대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듯 하다..

머..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하기로 하고..

만 10년이 된 지금, 무언가 새롭게 시작 혹은 무언가 값진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어떤것이 좋을까..

해서 오랜 시간(?) 끝에 결심한게 '블로그' 이다.

어디선가 SW개발자에게 블로깅은 필수라고 했던 글을 본 듯 하기도 한데.. 솔직히 시간을 내서 의미있는 글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었다.. 허나..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가면서, 고민하고 나누고 싶은 내용들을 블로그에 담아보고자 한다.

처음부터 무거운 주제로 시작하기에는 겁이 날 듯 해서리..

내가 그 동안 지나온 발자취를 한번 천천히 정리해 나가보고자 한다..

이유는..

첫째.. 나 자신을 돌아보고 또 다른 10년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함이다.

둘째.. 이공계 기피현상(?)과 특히 IT 관련 업은 3D 업종으로 생각하며 거들떠도 보지 않는 우리 젊은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내 업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해주고 싶고, 도전해보고 싶은 후배들에게 평범한 대한민국 개발자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기 위함이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거만해 보일 수도 있을 터인데, 저는 무척 평범하고 능력도 적당한 인간이기에 오히려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ㅡㅡㅋ)

셋째.. 그 동안 국내의 외국인들과 일하면서 느낀 감정 및 현실을 토대로, 대한민국 IT의 글로벌화에 조금이나마 기여 할 수 있는 글들을 써보고 싶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글들은 일기 형태로 풀어 나갈 생각이다.. 한 주에 한 개씩 써 나가봐야지..

현재 생각하는 콘텐츠는..

. 어린시절의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에 대한 경험

. 대학시절 컴퓨터 공학과 학생으로서의 삶

. SW개발병으로 입대하게 되는 과정

. 육군전산소에서 개발자로서의 프로젝트 이야기 - part 1,2

. 사회 생활 시작을 위한 준비 및  최초 SI  업체 진출기

. 두번째 SI 업체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기

. 사원때 초보아닌 초보 개발자로써의 프로젝트 방황기

. Framework 개발자 진입기

. 개발자 및 SA로써 수행한 대형 보험사 차세대 프로젝트 수행기

. SA/FA로써 수행한 대형 제조사 글로벌 프로젝트 수행기

. 내 개인 브랜드에 대한 고민 및 이직기

머.. 중간 중간에 조금씩 수정 될 수는 있겠지만.. 이런 형태로 진행 해 볼까 한다..

그럼.. 시작해 볼까?

>_



-- My Story ---------------------------------------












---------------------------------------------------